영암 영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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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암 영보정은 조선 전기의 문신 최덕지가 학문 연구를 위해 지은 정자로, 임진왜란 이후 중건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향촌 사회의 회합 장소로 사용되었으며, 보기 드문 규모와 독특한 건축 양식을 갖춰 국가지정문화재(보물)로 지정될 가치를 인정받았다. 일제강점기에는 항일구국정신을 교육하는 장소로 활용되었으며, 현재는 마을 축제의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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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암 영보정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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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영암 영보정 |
로마자 표기 | Yeongam Yeongbojeong |
한자 표기 | 靈巖 永保亭 |
유형 | 보물 |
지정 번호 | 2054 |
지정일 | 2019년 12월 30일 |
위치 | 전라남도 영암군 영보정길 10-8 (덕진면) |
시대 | 조선시대 (1635년경 중건) |
소유자 | 전주최씨·거창신씨 종중 |
관리자 | 신국빈, 최세렬 |
참고 사항 | 목조 / 정면 5칸‧측면 3칸, 팔작지붕 |
추가 정보 | |
전라남도 기념물 번호 | 104 |
기념물 지정일 | 1987년 1월 15일 |
2. 역사
영암 영보정은 조선 전기의 문신 연촌 최덕지/崔德之중국어(1384∼1455) 선생이 관직에서 물러난 후 영암의 영보촌에 내려가 학문 연구에 몰두하면서 사위 신후경과 함께 지은 정자이다. 선생은 학식이 높고 행동이 단정하여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으며, 많은 저서를 남겼으나 불타버려서 한 권만 남아 있고 여러 현인들의 논설만 전하고 있다.
처음 있던 정자는 황폐화되어서 최정과 신천익/慎天翊중국어(1592∼1661)이 지금 있는 자리로 옮겨 지었다. 정자는 앞면 5칸·옆면 3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현판은 한석봉이 쓴 것이라고 전한다.
일제강점기 때 영보정은 청소년들에게 항일구국정신을 교육한 장소로 역사적 의미가 크며, 해마다 5월 5일에 풍향찰(豊鄕察)이라는 마을 축제가 이곳에서 열리고 있다.
2. 1. 건립 배경
2. 2. 중건과 보수
2. 3. 일제강점기와 그 이후
3. 건축
3. 1. 구조 및 특징
3. 2. 건축 양식
3. 3. 조형미와 기술성
4. 문화재적 가치
「영암 영보정」은 향촌사회가 재편되어가던 15세기 중반 혹은 후반에 이곳에 정착한 전주 최씨와 거창 신씨 일족에 의하여 창건되고, 임진왜란, 정유재란 이후 1635년(인조 13) 경 중건되었으며, 이후 보수를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는 영암 지역의 대표적인 누정이다. 이웃한 장암정과 함께 동계(洞契)의 회합장소로 사용되었던 곳으로 향약 정자로서 보기드문 희소성을 가지고 있다.[2]
민간이 운영한 향촌의 누정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큰 규모를 가지고 있고 누정으로서 역시 유례를 찾기 어려운 높은 마루를 가지고 있으며, 후면열의 중앙에 구분된 방을 두는 독특한 평면형식을 가지고 있다.[2] 또한 전면과 양측면, 그리고 후면을 서로 구분한 창호와 난간 등의 건축적 장치, 익공(새 날개처럼 뾰족하게 생긴 공포)과 화반(포와 포 사이에 놓여 장혀[3]를 받치고 있는 부재), 대공(종보 위에 놓여 종도리를 받고 있는 부재) 등의 건축적 장식 등에서 등급을 나누어 다양성을 드러내고 있는 등 우리나라 누정 건축의 형식 발달사에 중요한 증거가 되고 있다.[2]
한편, 영보정이 지닌 입면의 비례감, 목재조각의 정교함, 휘어진 목재를 직선으로 만드는 기법 등의 조형성과 기술성이 우수하여 전통적인 목재 가공과 관련된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활용될 수 있어 학술적 가치가 높다.[2]
이처럼 영보정은 조선후기 동계의 회합장소로서 향촌사회의 한 단면을 실증적으로 보여주는 중요한 공간인 점, 1630년 경 조성된 오랜 건립 역사가 있는 점, 정교하게 짜인 익공식, 다양한 유형의 화반 배치, 간략하면서도 기능적 구조의 가구형식 등 건축구조와 양식 측면의 독특한 점에서 국가지정문화재(보물)로 승급하기에 충분하다.[2]
4. 1. 보물 지정 사유
영암 영보정은 향촌사회가 재편되어가던 15세기 중반 혹은 후반에 이곳에 정착한 전주 최씨와 거창 신씨 일족에 의하여 창건되고, 임진, 정유의 왜란 이후 1635년(인조 13) 경 중건되었으며, 이후 보수를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는 영암 지역의 대표적인 누정이다.[2] 이웃한 장암정과 함께 동계(洞契)의 회합장소로 사용되었던 곳으로 향약 정자로서 보기 드문 희소성을 가지고 있다.[2]민간이 운영한 향촌의 누정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큰 규모를 가지고 있고 누정으로서 역시 유례를 찾기 어려운 높은 마루를 가지고 있으며, 후면열의 중앙에 구분된 방을 두는 독특한 평면형식을 가지고 있다.[2] 또한 전면과 양측면, 그리고 후면을 서로 구분한 창호와 난간 등의 건축적 장치, 익공(새 날개처럼 뾰족하게 생긴 공포)과 화반(포와 포 사이에 놓여 장혀[3]를 받치고 있는 부재), 대공(종보 위에 놓여 종도리를 받고 있는 부재) 등의 건축적 장식 등에서 등급을 나누어 다양성을 드러내고 있는 등 우리나라 누정 건축의 형식 발달사에 중요한 증거가 되고 있다.[2]
영보정이 지닌 입면의 비례감, 목재조각의 정교함, 휘어진 목재를 직선으로 만드는 기법 등의 조형성과 기술성이 우수하여 전통적인 목재 가공과 관련된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활용될 수 있어 학술적 가치가 높다.[2]
이처럼 영보정은 조선 후기 동계의 회합장소로서 향촌사회의 한 단면을 실증적으로 보여주는 중요한 공간인 점, 1630년 경 조성된 오랜 건립 역사가 있는 점, 정교하게 짜인 익공식, 다양한 유형의 화반 배치, 간략하면서도 기능적 구조의 가구형식 등 건축구조와 양식 측면의 독특한 점에서 국가지정문화재(보물)로 승급하기에 충분하다.[2]
4. 2. 학술적 가치
「영암 영보정」은 향촌사회가 재편되던 15세기 중반 혹은 후반에 이곳에 정착한 전주 최씨와 거창 신씨 일족에 의해 창건되었고,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이후 1635년(인조 13)경 중건되었으며, 이후 보수를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는 영암 지역의 대표적인 누정이다. 이웃한 장암정과 함께 동계(洞契)의 회합장소로 사용되었던 곳으로 향약 정자로서 보기 드문 희소성을 가지고 있다.민간이 운영한 향촌의 누정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큰 규모를 가지고 있고, 유례를 찾기 어려운 높은 마루를 가지고 있으며, 후면열 중앙에 구분된 방을 두는 독특한 평면 형식을 가지고 있다. 전면과 양측면, 그리고 후면을 서로 구분한 창호와 난간 등의 건축적 장치, 익공(새 날개처럼 뾰족하게 생긴 공포)과 화반(포와 포 사이에 놓여 장혀를 받치고 있는 부재), 대공(종보 위에 놓여 종도리를 받고 있는 부재) 등의 건축적 장식 등에서 등급을 나누어 다양성을 드러내고 있어, 한국 누정 건축의 형식 발달사에 중요한 증거가 되고 있다.
영보정이 지닌 입면의 비례감, 목재 조각의 정교함, 휘어진 목재를 직선으로 만드는 기법 등의 조형성과 기술성이 우수하여 전통적인 목재 가공과 관련된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활용될 수 있어 학술적 가치가 높다.
조선 후기 동계의 회합 장소로서 향촌 사회의 한 단면을 실증적으로 보여주는 중요한 공간이며, 1630년경 조성된 오랜 건립 역사가 있고, 정교하게 짜인 익공식, 다양한 유형의 화반 배치, 간략하면서도 기능적 구조의 가구 형식 등 건축 구조와 양식 측면에서 독특하여 국가지정문화재(보물)로 승급하기에 충분하다.
5. 현대적 활용
영보정은 일제시대 때 청소년들에게 항일구국정신을 교육한 장소로 역사적 의미가 크다. 해마다 5월 5일에 풍향찰(豊鄕察)이라는 마을 축제가 이곳에서 열리고 있다.
5. 1. 풍향찰
5. 2. 문화 교육
참조
[1]
간행물
문화재청공고제2019-303호(강릉 경포대등 10건의 누정 문화재 국가지정문화재<보물>지정 예고)
http://gwanbo.mois.g[...]
관보(정호)
2019-11-14
[2]
간행물
문화재청고시제2019-176호(강릉 경포대 등 10건의 누·정 문화재 국가지정문화재<보물> 지정)
http://gwanbo.mois.g[...]
관보(정호)
2019-12-30
[3]
문서
장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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